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축년 대홍수 (문단 편집) == 피해 및 영향 == 홍수가 한 해에 모두 4차례나 닥쳐 논 3만 2천여 단보, 밭 6만 7천여 단보, 가옥 6천여 호가 유실되었다. 그 외에 붕괴된 가옥은 1만 7천여 호, 침수된 가옥은 4만 6천여 호에 사망자가 647명이나 발생하여 피해액만 1억 300만 원에 이르렀다. 이 액수는 당시 [[조선총독부]] 1년 예산의 60%에 맞먹었으니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. 이후 총독부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본류는 물론 [[안양천]]과 같은 한강 지류에까지도 제방을 엄청나게 건설하여 복구 작업을 펼쳤다. 이 과정에서 골재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선유봉(오늘날의 [[선유도]])을 폭파했다.[* 물론 이 때 건설된 제방으로 혜택을 입은 조선인들도 많았지만 일본이 제방을 만든 가장 큰 목적은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서 였다.] [[파일:external/www.segye.com/20141118003907_0.jpg]] 또 이 홍수의 영향으로 잠실섬 주변의 '''한강 본류가 바뀌었다.''' 잠실섬 남쪽의 송파강([[석촌호수]])에서 북쪽의 신천강([[잠실새내역]] 이북)으로 바뀐 것이다. 20세기 초반 이래 이 지역에서 한강의 직류화 경향이 자연적으로 진행되던 상황이었다. 즉, 기존의 송파강이 아니라 새로 생긴(新) 하천(川)인 신천으로 유량 유입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. 그런데 이 대홍수를 계기로 아예 신천이 본류가 되어 버렸다. 결국 이로 인해 송파강으로 먹고 살았던 송파나루는 급격히 쇠퇴했다. 송파나루는 유량이 풍부해서 배가 정박하기 좋았기 때문에 [[원주시|원주]], [[춘천시|춘천]], [[단양군|단양]], [[영월군|영월]] 등 한강 상류의 물자가 이곳으로 집결했고 이곳을 통해 영남, 강릉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왕래했다. 실제로 이곳에는 조선시대 전국 15대 상설장터였던 송파시장이 있었을 정도. 그리고 이곳에 송파진이라는 군영이 설치되어 강 건너 뚝섬, 동잠실, 삼전도, 광나루까지 관할하였다. 조선시대만 해도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.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쇠퇴의 기미를 보이더니 을축년 대홍수의 직격탄을 맞아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. 을축년 대홍수의 여파로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에 자리잡던 주민들도 인근 석촌, 가락 등지로 이주하여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. 2018년 [[송파나루역]]이 개통하여 이름'''만''' 남았을 따름이다. 이후 중대면 일대의 주거지가 현재의 [[백제고분로]] 뒤쪽으로 크게 후퇴했다. 그리고 잠실 일대의 양잠도 홍수로 뽕밭이 다 쓸려나가고 토양이 척박해짐으로써 쇠퇴해 버렸다. 양잠으로 번성하였던 잠실, 신천 일대와 송파나루로 번성하였던 광주군 중대면 일대[* 1963년 [[서울특별시]]에 편입되었다.]는 1971년 한강공유수면사업으로 인한 잠실택지지구 개발, 1985년 [[가락시장]] 개장, [[1986 서울 아시안 게임]] 개최, [[1988 서울 올림픽]] 개최, 1989년 [[롯데월드]] 개장까지 약 50년 동안 잊힌 땅 취급을 받아야 했다. [[안양천]]의 물길도 바뀌어 지금의 [[영등포구]] 양화동 지역이 영등포 생활권에 편입되어 버렸다. 또 이 홍수 때문에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 논의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1936년에야 경성부에 편입되었다. 그 외에 성수동 [[뚝섬]]의 유래가 된 사당 둑신사(纛神祠)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[[서울경동초등학교|뚝도공립보통학교]](현 서울경동초등학교)의 교사가 유실되었으며 [[서울 암사동 유적|암사동 선사유적지]]가 이때 발견되었다. [[남한산성]] 행궁과 [[북한산성]] 행궁, 그리고 성벽 일부가 당시 홍수로 인해 발생한 산사태에 매몰되었다. 산성은 1975년부터, [[남한산성 행궁]]은 2002년부터 복원을 시작해서 2014년에 마무리되었다. [[북한산성 행궁]]은 정비, 복원 중이다. 당시 [[봉은사]] 주지였던 청호 스님은 절의 재산을 털어서 배를 구입해 고립된 이재민들을 구조하였는데 그 수가 700여 명에 달했다.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이후 청호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는데 봉은사에 남아 있다. 또 당시 지식인들이 청호를 기리는 글과 그림 등을 모은 불괴비첩(不壞碑帖)도 남아 있다. 여담으로 [[2020년]]과 음력 3~7월이 완전히 달력과 일치하고 윤 4월도 있었다. 마찬가지로 2020년에 [[2020년 중국 폭우 사태|옆나라]][[2020년 일본 서남부 폭우 사태|들은]] 폭우가 일어났지만 한국에서는 장마전선이 북상하지 않았다 보니 [[부울경]] 등을 제외하고는 비가 적었으나 곧 [[2020년 한반도 폭우 사태]]가 일어나고 [[2020년 7월 한반도 이상 저온|이상 저온]]까지 발생하서 2020년 역시 비가 많이 왔다.[* 다만 앞에서 설명했던 을축년 대홍수와 [[2020년 한반도 폭우 사태]]는 그 양상이 다르다.] 2022년에도 [[2022년 8월 수도권 홍수|서울에서 짧지만 강력한 폭우]]가 나타났다. 그리고 [[2023년 여름 한반도 폭우 사태|2023년]]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. [[분류:문화 통치기/사건사고]][[분류:한반도의 폭우]][[분류:1925년 재난]][[분류:홍수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